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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과 그 메카니즘 | [혼과 그 메카니즘] 4장 혼의 본성과 그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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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이트로즈 작성일15-02-14 23:30 조회38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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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007, Vote: 4, Date: 2005/01/28 17:33:37 , IP: 220.93.126.13
글 제 목 [혼과 그 메카니즘] 4장 혼의 본성과 그 위치
작 성 자 문성호



혼과 그 메카니즘: 4장 혼의 본성과 그 위치

제4장 혼의 본성과 그 위치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혼은 논의와 논쟁의 주제가 되어 왔고 이를 정의해 보려는 노력이 있어 왔다. 이것은 여러 시대 동안 최고의 지적 관심 거리이자 모든 종교와 철학의 주요 주제였으며, 여전히 그러하다. 이런 사실만으로도 혼에 대한 수 천년의 증언이 실제로 어떤 기초를 갖고 있어야만 하고 자연히 하나의 사실일 수 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히스테리나 노이로제와 병적인 환상과 경험에 기초한 추측을 배제하면 인류에 의해 부정되지 않고 확인을 보증하는, 건전하고 훌륭한 사상가,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들로부터 나온 증언과 추론 구조의 잔여물이 남는다.

리처드 뮐러 프라인펠스 박사는 “혼에 대한 인간의 신앙사를 쓰기 위해서는 인류사 전체를 쓰는 것과 같은 시간이 들 것이다.”라고 말한다. 리차드 프라인펠스 뮐러, 혼의 신비, p. 24.

이 문제는 아메스 교수가 잘 요약해 놓았다.

“한 쪽에는 자아 또는 혼이 생각과 함께 있고, 다른 쪽에서는 대상, 즉 사람들과 신의 세계가 있다. 수 세기 동안 현자들은 자아와 대상 사이의 틈을 넓히는 방법을 발견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머리 속에는 사상이, 외부에는 사물이 존재한다는 생각과 함께 머리 속의 상상들이 외부에 있는 대상에 대해 참이라는 것을 보증할 수 있는 확실한 연결 통로는 전혀 없었다. 이 해협의 양측에 일군의 철학자들이 도열해 있었다. 자아 쪽에 서 있는 관념론자들은 자신들의 앎에서 분리했던 실재에 이르려고 자신들을 확장시켰지만 헛된 것이었다. 반대 쪽에서는 유물론자들이 자아를 무시하거나 그것이 환영 또는 물리적인 세계로부터 유출되는, 숨이나 안개 같은 수반현상이라고 간주했다. 이른바 이원론자들은 실재가 심령적인 것과 물리적인 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했지만, 각자 그 위치를 인정하여, 마음이 어떻게 그 자체로부터 기인하면서, 그렇게 다른 객체로 가는지, 또는 객체가 어떻게 그 자체일 수 있고 파악될 수 있는지 묻는 질문에 적절히 답하는 데에 성공하지 못했다.” 에드워드 스크라이브너, 아메스 시카고 대학 철학 교수, 종교, pp. 127-128.


혼에 대한 정의를 몇 가지 살펴 보고자 한다. 이들은 수많은 정의에서 취합한 것이다. 정의와 설명에서 매우 분명한 일치가 있다. 웹스터 사전에는 몹시 흥미로운 어구로, 매우 정확하게 동양 지혜의 관점에서 혼을 정의하고 있다.

“개별 생명, 특별히 심령적인 활동에서 나타나는 생명의 본질, 본체, 또는 동인으로 생각되는 실체. 개별적인 실존의 매체, 몸과 본성상 분리되어 있고, 실존상 분리될 수 있다.”

혼의 본성에 대해 다른 해석을 살펴 보면 세 가지 관점이 나타나는데, 이들은 웹스터 사전에 잘 요약되어 있다.

“첫째, 혼은 실체 또는 주체로 다루어지고 특히 사람의 의지적인 사고 활동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몸을 통한 경험의 주체이다. 그것은 마음이 아니고, 사고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둘째, 혼은 마음 또는 의식적인 경험과 동일시된다. 이것은 심리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의미로, 관념론자들의 일반적인 이해이다.

“셋째, 혼은 뇌의 작용 또는 기능들의 총합이다. 그래서 피에르 J. G. 카바니스(1757-1808)는 위가 음식을 소화하듯 뇌는 사고를 분비한다고 가르쳤다.”

웹스터는 현재 사고의 적용 경향을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페히너의 이해처럼 혼은 단일한 전체, 즉 단일한 몸의 과정 전체와 결합되는 영적인 과정으로 관념론적이고 유물론적인 관점 사이에 서 있다.” 웹스터 사전, 1923년 판

무엇보다도 불교도가 강조하는 “숭고한 중도”는 다음 세대를 위해 극단적인 입장에서 벗어나는 길을 취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은 혼이 신의 광선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는 특이하고 유체같은 화합물을 통해 움직인다. 인도인들은 사람의 혼이 불변의 원리, 세계혼, 우주혼anima mundi, 우주 도처에 퍼져 있는 에테르Akasa의 일부라고 가르친다. 이 에테르는 단지 특별한 형태의 에너지를 지휘하는 자이고 본질적인 영혼과 감각적인 물질 사이에서 상호작용하는 매체로 작용할 뿐이다.

동양과 서양 철학을 연결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했던 피타고라스는 동일한 가르침을 주었다. 중국에서 노자는 영적인 혼은 반물질적인semi-material 생기있는 혼과 결합되며, 그러는 가운데 육체를 활기있게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스인들은 (모든 정신적인 능력을 지닌) 혼은 몸과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한 반면 로마인들은 혼이 영적인 혼, 지성적인 혼 또는 마음, 그리고 생기체로 구성되는 삼개조라고 간주했다. 테오프라스투스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열정의 참된 원리”로 간주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스토아 학파는 프노이마(pneuma: 영, 정신)라는 생기의 원리 또는 생기의 발전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유포시켰다... 프노이마의 도입과 함께 인간 개성의 몸, 혼, 영이라는 3원론이 시작되었고, 이것은 신학자들의 사색 속에서 탁월하게 형성되었다. 혼 또는 심령이라는 개념은... 두 가지 개념으로... 즉 한편으로는 생리학자들의 활력vital force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영혼 또는 인간의 비물질적 혼으로 분화되었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권, pp. 53-54.


그렇게 스토아학파는 동양 철학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가르침을 강조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과 서양 사이에 벌어진 틈에 다리를 놓았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혼의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혼이 세 부분을 지닌다고 믿었다. 하나는 신으로부터 오는 불멸 또는 합리적인 부분이고, 다른 하나는 몸에 속하는 식욕과 감각의 자리인 필멸의 동물적 또는 감각적인 부분이다. 세 번째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으면서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 즉 의지 또는 영혼으로 이를 통해 이성은 욕망을 정복한다. 식물은 최하위 부분을 갖고 동물은 두 가지 하위 부분을 갖지만, 합리적인 부분은 전적으로 인간의 몫이다.

이 이성적인 혼을 그는 본성상 감각에 의해 파악되지 않고 오직 지성에 의해서만 파악되는 비물질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필멸의 몸과의 결합은 장구한 생애 동안에 나타나는 사건 중에서 사소한 것일 뿐이다... 플라톤은 그래서 혼과 몸을 기본적으로 구별했다.” 상동. p. 35.


아리스토텔레스는 혼을 생기vital 원리들의 합으로 간주했고 존재가 몸에 대한 것은 시각이 눈에 대한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혼은 육체 내에 있는 진정한 존재였으며, 플로티누스는 그에게 동의했다. 그는 혼을 물질보다 더 높은 존재에 속하는 육체의 살아 있는 지각력으로 간주했다. 터툴리안은 성 그레고리가 했던 것처럼 혼을 생기 원리와 합리 원리,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대부분의 동양 학파들은 혼을 자아, 즉 개체로 간주했고, 기독교 신비주의는 “내면의 그리스도”인 그의 부름과 그의 현존에 의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상태를 얻을 수 있게 하는 잠재력이 각 인간에게 존재한다는 성 바울의 가르침과 연결된다. 기독교와 동양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비교하면 자아, 혼, 그리스도라는 용어들이 동일한 존재나 의식 상태를 내포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 안에 존재하는 주관적인 실재를 가리킨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혼에 대해 그리스인의 사고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의 가르침은 뒤에 영지주의와 마니교에 의해 윤색되었다. 그들은 혼은 빛으로 몸은 어둠으로 간주했다. 빛은 몸을 비춰서 결국 몸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4 세기의 성 그레고리는 성 바울이 했던 것처럼 몸, 혼, 영이라는 몸의 삼중성을 강조했다. 그는 그 시대의 가장 훌륭한 사상가들의 관점을 자신의 가르침에서 요약하였다.

“혼은 부분을 갖지 않지만, 그레고리는 영적인 능력, 감각적인 능력, 그리고 이성적인 능력을 구분해서, 몸, 혼 그리고 영에 대응시켰다. 이성적인 본성은 몸의 모든 부분들에 동등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상위 본성은 하위 본성을 매체로 사용한다. 물질에는 생기력이 들어 있으며, 생기력에 감각력이 거주하며, 감각력에 이성력이 결합된다. 감각적인 혼은 그래서 매체이며, 육신보다는 순수하고 이성적 혼보다는 탁하다. 그래서 몸과 결합된 혼은 모든 활동의 진정한 원천이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권, p. 88.


5 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파들이 혼에 대해 사고를 전개했다. 스콜라학파, 아랍의 철학자들, 카발라 연구가들, 중세의 철학자들, 그리고 종교 개혁과 르네상스를 불러일으켰던 일군의 유명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혼에 대한 다양한 이론들을 논했지만, 많은 진보를 이루지는 못했다. 왜냐면 모두가 서서히 현대 과학의 출현, 현대 의학의 수립, 그리고 전기 시대의 출현을 향해 점차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점차 자연의 형태 측면과 자연 현상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관심을 끌면서, 혼과 그 본성에 대한 사색이 신학자들에게 점차 이관되었다.

17 세기에 슈탈은 혼을 주제로 글을 썼고, 당시에 존재하는 엄청나게 많은 양의 가르침을 요약했다. 이것을 애니미즘 이론(Theory of Animism: 활력론: 혼이 생명에 원천이라는 설)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혼이 생명 원리이며, 모든 유기적 발전의 원인이 된다는 학설이다. 애니미즘이라고 하면 자연의 힘들을 인격화하고 숭배했던 진화가 덜된 종족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슈탈이 요약한 애니미즘은 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존재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힘과 에너지, 원자에 대한 현대 과학자들의 가르침을 연구하면서 부정할 수 없는 에너지의 세계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여러 가지 힘들에 의해 움직이는 우주에 살고 있다. 속도, 활동, 활기, 이동, 소리 전달, 전기 에너지, 그러한 많은 말들은 오늘날 표제어가 되어 있다. 우리는 힘에 대해 말하고 생각한다.

슈탈은 다음과 같은 말로 가르침을 요약했다.

“몸은 혼을 위해 만들어졌지 혼이 몸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 산물이 아니다... 모든 생명 운동의 원천은 혼이다. 이것은 몸의 기관을 구성하고 있으며, 외적 영향에 대해서 잠시 그것을 유지한다...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은 질병이 아니라, 심각한 외상에 의해 작동할 수 없게 되거나 더 이상 그것을 작동시키지 않겠다고 선택했기 때문에, 혼이 몸의 기관을 떠나는 직접적인 행위 때문이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169.


버클리의 혼에 대한 정의는 재미있다. 왜냐면 그는 경험을 통해 그것을 간단하고 활동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혼을 두뇌 활동의 산물로써 간주하는 현대의 유물론적 심리학은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니겠지만, 생명 혼을 부차적으로 다루고 있다.

뮐러 프라엔펠스 박사는 말한다.

“... 우리는 몸을 원자적 메카니즘으로 간주해서는 안되고 광범위한 생명 에너지의 매체로 간주해야 한다. 그래서 ‘몸’이 단순한 물질임을 그치고 ‘활기찬’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는 또한 계속 말한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우리는 혼의 이해에 이를 가능성을 본다! 인류가 이 개념을 어떻게 형성하게 되었는가 기억해 보자. (의식 없이 ‘혼’이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의식’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른바 생명이라는 활동의 복잡한 지속성을 이해하기 위해서 인류는 혼이라는 개념을 창조했다. 우리는 이미 모든 원시 문화들에서 ‘혼’은 결코 의식과 동일한 것이 아니고 이러한 동일시가 그 후에 철학적으로 은폐되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사실상 원시인들이 ‘혼’이라고 이해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활기있는Animated’ 것과 ‘살아 있는alive’ 것은 개념상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마치 ‘활기없는inanimate’ 것과 ‘죽은dead’ 것이 동일한 것과 똑같다. 그리스어 프시케psyche는 결코 의식만을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생명’으로 번역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와 같이 많은 경우에 독일어 레벤Leben과 젤레Seele도 영어의 ‘라이프life’와 ‘소울soul’이 서로 바뀔 수 있는 것처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현대 철학의 주 경향들이 모두 하나가 된다. 후기 유물론자들도 혼은 본체가 아니지만, 심령적 과정이 본체 내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그것을 ‘움직임motion’과 동등하다고 간주했다. 다른 한편 양심주의자들conscientialists도 심령적 과정을 물리적 운동과 어느 정도 관련지워야 하는 ‘사건events'으로 간주한다.

우리는 이 두 관념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이른바 ‘혼’이라는 것은 확장된 ‘본체’나 생각하는 ‘본체’가 아니다. 그것은 ‘본체’가 아니라 매우 복잡한 사건들, 즉 여러 가지 결과들의 연속성으로, 한편으로는 몸의 구조 속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이 학설은 우주를 본체와 의식으로 나누지 않고, 둘 사이에 한편에서는 물질적으로 나타나고, 또 한편으로는 의식이라는 가설의 연결 고리를 설정하는데, 이 점에서 유물론과도 다르고 관념론과도 다르다. 그것은 혼을 본체 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의식 속에만 존재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의식과 몸은 둘 다 우리에게 의식을 산출하고 또한 원물질에 형상을 부여하면서 이 둘을 모두 포괄하는 제 3의 사물의 결과일 뿐이다. 의식은 보다 심원한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지만, 유물론은 몸을 형성하고 그와 함께 혼을 형성하는 형태를 이루는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살펴 보았다. 이 이론은 비록 이원론을 회피하는 것처럼 일방성을 회피함에도 불구하고, ‘일원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개념이 남용되어 왔고, 비록 정확하지는 않지만, 관념론과 유물론은 둘 다 단원론으로 설명된다.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이론은 역학론이라고 불린다. 왜냐면 그것은 혼의 본성을 지도받는 힘으로 설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이것을 활력론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 힘이 몸에 형상을 부여하고 의식을 야기시키고, 생명과 동일한 것으로 증명되기 때문이다.” 리차드 뮐러 프라엔펠스, 혼의 신비, pp. 40. 41. 42.


우리는 이 세 가지, 즉 영혼, 혼 그리고 몸 사이의 관계에 대한 암시를 비경The Secret Doctrine에서 얻게 된다.

“우리는 삶을 이른바 물질 속에 나타나는 실존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또는 부정확하게 분리시키면, 사람 안의 영, 혼, 그리고 물질이라고 부른다. 물질은 실존계에 혼이 현현하기 위한 매체이고, 혼은 영의 현현을 위한 상위 계의 매체이고, 이 셋은 모든 것에 퍼져 있는 생명에 의해 종합되는 삼개조Trinity이다.” H. P. 블라바츠키, 비경, I권, pp. 79,80.


혼과 자아는 동양의 문헌에는 동의어로 나온다. 혼, 그 본성, 목적 그리고 실존 양식에 대한 주요 보고서로는 바가바드 기타가 있는데, 이는 동양의 모든 경전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더이쎈은 아트마, 자아 또는 혼에 대한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만약 현재의 목적을 위해서 우주의 일반 원리로서 브라만을, 심령적 원리로서 아트만이라는 도식에 따른다면, 모든 우파니샤드 철학의 기본적인 사고는 간단한 등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

브라만 = 아트만

이것은 존재하는 모든 사물 속에 물질화되어 나타나는 힘인 브라만으로 모든 세계를 창조, 유지, 보존,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로 회복시키며, 이 영원하고 무한한 성스러운 힘은 아트만과 동일하며 외적인 모든 것을 탈각한 이후 우리는 내면에서 진실하고 가장 본질적인 존재, 우리의 개적인 자아, 즉 혼을 발견하게 된다. 브라만과 아트만의 이 동일성, 즉 신과 혼의 동일성은 우파니샤드의 모든 가르침 중에서 기본이 되는 사고이다...

아트만은 이미 지적한 것처럼 매우 해석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이 단어는 바로 ‘자아’를 의미하는데, 여기서 자아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입장이 가능한데, 아트만의 이해에 따라 (1) 물질적 자아, 몸 (2) 개체 혼, 즉 몸으로부터 자유롭고 앎의 주체로써 대상과 대립하고 구분되는 자 (3) 지고의 혼, 주객은 더 이상 서로 구분되지 않거나 인도의 이해에 따르면 대상 없는 앎의 주체이다.” 파울 듀센 의학박사, 인도의 종교와 철학, pp. 39. 94.


어느 동양의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모든 유기적 존재들은 자기 결정의 원리를 갖고 있는데, 그에게는 ‘혼’의 이름이 일반적으로 주어진다. 엄밀한 의미에서 ‘혼’은 내면에 생명을 갖는 모든 존재에 속해 있으며, 서로 다른 혼들은 본상상 동일하지만, 차이가 존재한다면 혼의 생명을 모호하게 하고 방해하는 물리적인 조직 때문이다. 혼이 결합되는 몸의 본성에 의해 다양한 모호성의 정도가 나타난다.

감각 등의 파악과 더불어 각각의 부띠buddhi는 과거의 업보karma에 의해 결정되는 고립된 유기체이며, 그 자신과 특이하게 관련되는 무지(avidya: 무명)를 지닌다. 자아ego는 우리가 경험적 자아의 내면적 생명으로 알고 있는 것을 구성하는, 연속적인 의식 경험의 심리적 통일체이다.

경험적 자아는 자유로운 영혼과 메카니즘, 즉 뿌루샤와 쁘라끄리띠의 혼합이다... 모든 자아ego는 죽을 때 해체를 겪는 조잡한 육체 내에 감각을 포함한 심령적인 장치로 형성된 미세체subtle body를 지니고 있다.” S. 라다크리슈나, 인도 철학, II 권, pp. 279, 283, 284, 285.


어느 인도 경전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그래서 생명, 마음, 혼, 영혼이라는 네 가지 아트마가 있다. 혼, 마음, 생명 원리의 대우주적 현현력의 뿌리에 놓여 있는 궁국적인 힘은 영혼이다.’” 라마 쁘라샤드, 자연의 미세한 힘들, p. 121. (쁘라슈노빠니샤드에서 인용))


그러므로 모든 것은 생명력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물질은 영혼 또는 에너지가 가장 낮게 나타난 것이며 영혼은 물질이 가장 높게 표현된 것이라는 동양에서 공식화된 진리에 우리는 접근하기 시작한다. 이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그래서 시공간 속에서 특이한 편애와 경향에 따라 종교인, 심리학자, 과학자, 그리고 철학자의 관심을 끄는, 현현한 생명 의식의 다양성이 나온다. 모두가 활기 있는 한 생명의 변화하는 국면을 연구하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다양한 접근법과 관련되는 차별화, 용어, 그리고 그 요약은 많은 혼란의 원인이 된다. 우리는 통일된 실재를 부분으로 분리하는 데에 참여하고 있고, 그렇게 해서 균형 감각을 잃어버리고 일시적으로 분리시킨 특별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한다. 그러나 전체는 완전한 상태로 남아 있고, 우리가 의식을 총괄하여 진정한 경험에 참여함에 따라 이 실재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이 자라나게 된다.

이 경험에 대한 증언은 바로 시간의 밤으로부터 추적될 수 있다. 세계의 계획에 따른 진화적 발전 과정에서 인간 가족이 출현한 때로부터, 자연을 설명하기 위한 신 관념과 인간을 설명하기 위한 혼 관념은 진보적인 발전을 나란히 이루어 왔다. 혼을 다룬 저작은 그 과제의 중대성 때문에 발전이 지체된 상태로 남아 있다.

혼이 발견될 수 있는 위치와 사람의 형상 안에 들어 있는 위치에 대한 추측은 항상 많이 있었다. 그에 대해 제안된 몇 가지 이론들을 여기서 다뤄 보기로 한다.

플라톤은 생명의 원리가 뇌 속에 있으며, 뇌와 척수는 생명력의 조정자라고 주장했다.

스트라토는 뇌의 앞부분의 양미간에 그것이 위치해 있다고 보았다.

히포크라테스는 뇌 안에 의식 또는 혼이 있다고 했고,

헤로필루스는 calamus scriptorius를 혼의 주요 자리로 삼았다.

에라시스트라토스는 소뇌에 혼을 위치지웠으며,그것은 운동의 조절에 관여한다고 말했다.

현대 의술의 위대한 선구자 갈렌은 제 4 뇌실을 인간 혼의 고향이라고 주장했다.

(기원후 3세기의) 히폴리투스는 “송과선을 향해 나가는 영혼에 의해 뇌막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그 근처에 영혼의 흐름을 받아 척추로 전달하는 소뇌의 입구가 위치한다.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불가사의한 과정에 의해 이 소뇌는 송과선을 통하여 영적이고 생명을 부여하는 물질을 끌어들인다.”

성 어거스틴은 혼이 중간 뇌실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중세 사상의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아랍의 철학자들은 뇌실을 혼이나 의식적인 생명의 자리로 생각했다.

홀랜더 박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뇌의 위치에 대해 아랍인들이 취했던 강(腔) 또는 동공을 의미하는 특정 세포에 고대 철학자들이 그 기능을 위치지우려고 했던 이유는 기체 상태인 프노이마가 확장할 공간 상의 여유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은 4 가지 부위를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이마 쪽을 향해 있다고 생각된 제1 또는 전방 뇌실은 일반적 의미의 동공이었다. 왜냐면 그로부터 5 가지 외부 감각의 신경들이 뻗어나가 있고, 이들 신경의 도움에 의해 그 속으로 모든 감각들이 결합된다고 가정했기 때문이다. 제 2 뇌실은 제 1 뇌실과 함께 작은 입구로 연결되어 있는데, 상상적 능력의 자리로써 고정되었다. 왜냐면 다섯 가지 외부 감각으로부터 인상들이 제 1 뇌실로부터 그곳으로 전달되기 때문이며, 이것은 뇌를 통과하는 두 번째 단계를 이룬다. 제 3 뇌실은 이해의 자리였다. 그리고 제 4 뇌실은 기억에 할당되었다. 왜냐면 제 2 뇌실에서 흡수된 마음의 개념 작용이 집중과 집적을 위해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사실 상 이른바 전실은 두 동공으로 구성된다. 좌측과 우측의 뇌실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 받으며 제 3 뇌실과 연결된다. 고대에는 이 중실이 몬로의 소공이라고 불렸다. 제 4 뇌관과 세 번째 뇌관은 신호를 주고 받는다. 고대인들은 이 후실을 실비우스의 맥관이라고 불렀다.

측실들은 뇌량corpus callosum으로 지붕처럼 덮혀 있다. 제 3 뇌실은 시상optic thalamus으로 덮혀 있고 제 4 뇌실은 소뇌와 연수 사이에 위치한다... 만약 시각과 청각이 동시에 자극되면, 그 효과는 어쨌든 의식 내에서 결합되고, 이 사실에 대한 지식은 공동 감각중추sensorium commune 또는 공동 감각(common sense: 일반 상식)이라는 말이 적용되는 감각 센터의 가설에 영감을 주었다. 이것은 혼의 자리로 간주되기도 했다. 뇌의 부분들은 중복되기 때문에 위치 선택이 매우 제한되며, 중심선에 있는 조직들만이 선택될 수 있다. 예를 들면 데카르트에 의해 송과선이, 그리고 19세기에는 W. B. 카펜터에 의해 시상이, 그리고 허버트 스펜서에 의해 연수pons cerebri가 선택된 것과 같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97.


로저 배이컨은 뇌의 센터를 혼이 발견될 수 있는 장소로 간주했다.

루도비코 비베스는 “혼을 의식적인 생명일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생명의 원리로 간주했다. 심장은 그 생명 활동 또는 생장 활동의 센터이고, 뇌는 지성적인 활동의 센터이다.” 상동. p. 119.

중세의 유명한 해부학자 문디누스는 “동물 영혼”이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이 동물 영혼이 협소한 통로을 통해 제 3 뇌실로 들어간다고 가르쳤다. 그는 또한 뇌의 세포질들이 지성의 자리라고 가르쳤다.

뇌의 회질과 백질의 차이를 처음으로 구분했던 베살리우스는 5 개의 뇌실을 설명하여, “세 개의 혼들을 구분했으며,.. 기능이 특히 정신적이었던 동물 영혼의 합인 주요 혼을 뇌에 배당했다.” 버나드 홀랜더 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129.

세르베투스는 뇌의 제 3 뇌실과 제 4 뇌실을 연결하는 통로인 실비우스의 맥관에 혼을 위치지웠다.

De Rerum Natura에서 텔레시오는 “혼은 가장 미세한 형태의 물질, 매우 미묘한 본체로 신경계 내에 갇혀 있어서 우리의 감각에서 벗어나 있다고 가르쳤다. 그 자리는 주로 뇌이지만, 또한 척수, 신경, 동맥, 정맥, 그리고 체내 장기의 외피로 확장한다... 신경계는 혼-생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사람의 혼은 동물의 혼과 그 정도에서만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사람의 물질적 혼에서 벗어나 그 물질적 혼과 결합되는, 신에 의해 직접 각인된 신성한 비육체적 혼을 추정했다.” 상동, 132.


윌리스는 정신성, 활기, 기억 등 혼의 다양한 기능을 뇌의 다른 부위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았다.

뵈쌍Vieussens은 centrum ovale에 혼을 두었다. 스웨덴보르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혼에 대한 육체 감각의 왕도는... corpora striata를 통한다... 의지의 결단도 모두 그 길을 하강할 것이다... 그것은 올림푸스의 머큐리이다. 몸에 일어나고 있는 것은 혼에 알려지고, 거기에는 혼이 몸으로 내린 명령도 담겨 있다.” 버나드 홀랜더 의학박사, 혼을 찾아서, I 권, p. 186.

코르포라 스트리아타는 전두엽과 후두엽 바로 아래에 있는 한 쌍의 거대 뇌신경절이다.
홀리스는 “감각과 운동은 둘 다 뇌수질에서 동력을 받기 때문에 이것이 혼의 자리이다,”라고 결론을 맺었고

챨스 보넷은 이렇게 말했다. “다른 감각들은... 우리가 부여받은 것... 뇌 속 어딘가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단으로 비밀스러운 교신을 한다. 교신들이 일어나는 부분은 혼의 자리로 간주되어야 하는 것이다... 혼이 몸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에 의해서이고 몸으로 다른 존재들에 작용한다. 이제 혼은 신경에 의해서만 작용한다.” 상동, p. 190.

반면 폰 좀머링은 혼의 자리를 대뇌의 유동체에 위치지웠다.

심리학자 W. B. 카펜터는 시상을 혼 생명의 자리로 간주했다.’ 이 다양한 저자들의 결론은 위에 인용된 홀랜더 박사의 저작에서 가져 온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물활론자이자 물리학자이고 골상학의 창시자 프랜시스 죠셉 겔의 시대로부터 혼의 위치는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마음이 조명을 받게 되었고, 성격, 윤리, 그리고 이른바 인성학(Ethology: 품성학)이 나타나게 되었다. 뇌와 심적 기질들과의 관계가 연구 주제로 되었고, 오늘날은 분비선을 포함시켜서 이러한 관념을 연구 과제로 수행해 나가고 있다. 심리학의 현대적이고 유물론적 원리들은 일시에 낡은 생기론적, 물활론적, 그리고 신비적 관념을 대체해버렸다. 그렇지만, 유물론적 접근법은 대단히 큰 가치가 있다. 그것은 많은 공헌을 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두 가지이다. 그것은 우선 균형을 유지시켰고, 지식 구조를 만들었으며, 자연적 사실에 기초했으며, 예언적 신비가의 오류와 결론, 그리고 종교 신학자들의 미신들을 상쇄시켰다. 둘째, 현대 심리학자들의 작업을 통해, 마음, 그리고 그 힘의 연구를 통해, 그리고 크리스챤 사이언스와 신사고와 같은 조직의 영향을 통해 이뤄진 결론에 의해 동양과 서양 사이에 가교가 건설되었다. 이제 혼, 마음 그리고 뇌의 삼중성triplicity에 대한 동양적 가르침이 납득되고 이해될 수 있다. 바람직스럽지 않은 모습들을 제거한 뒤에 (그리고 현재 몇 개가 있다) 서양 과학과 협력하여, 빛은 다시 동방에서 비칠 것이며 새로운 존재 상태로, 권능의 더 완전한 실현으로 인간 혼의 본성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르도록 인류에게 길을 제시할 것이다. 그때 우리는 브라우닝이 이 통합된 인간에 대해 이해한 것이 진실임을 절실하게 느낄 것이다.

“세 혼이 한 혼을 구성하네, 첫째는 지혜,
한 혼이 신체 부위 각각으로 모두로 이뤄지니,
그 속에 들어서, 일하는, 행위자,
땅을 향유하다가, 그것이 끝나자 사람은
하락하네, 허나 충고 따라 위를 향해
안으로 자라고, 다시 안으로 자라나
다음 혼까지, 뇌 속에 자리하네
첫째를 이용하니 합하여 쓰는구나
느끼고, 사고하고, 의지하는, 지자(知者)
때맞춰 방향을 위로 돌리고
안으로 자라고, 다시 안으로 자라나
마지막 혼에 의해, 모두 첫째를 쓰는구나,
지원 받든 받지 않든 자존하고,
사람의 자아를 구성하는 존재자
전자(前者)에 의지하여 놀게 하고,
첫째가 끝내면 위로 향하여,
신은 유지하고 지지되니, 끝나는 것은 인간
영적 교통의 경외로운 순간 위를 향해,
어느 장소도 필요 없이, 그에게로 돌아가니.
행위자, 지자, 존재자, 세 혼들에 한 인간.”

로버트 브라우닝, 사막에서의 죽음. (로버트 브라우닝, 사막에서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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